HOME |  CONTACT US |  ADMIN

쓰시마소식
ㆍHOME > 커뮤니티 > 쓰시마소식
제목 한일 새로운 100년과 부산 <3> 도고 승전비 다시 보기-국제신문(2010.8.10)
등록일 2010. 08. 10 조회수 3,077
남해안에 日전쟁영웅의 흔적… 과거청산 없이 복원되겠나

-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벤치마킹
- 日 해군제독 도고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함대 궤멸
- 러일전쟁 승리로 대한제국 병합 물꼬 튼 장본인
- 거제와 진해에 승전비와 승전탑, 친필 비문 등 자취 남아
- 이순신 프로젝트 추진 때 복원 시도… 일부 반대로 무산
- 한일 과거사 족쇄 日정부가 풀어야


1905년 5월 27일 오후 2시께 대한해협.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마침내 쓰시마 앞 대한해협에 모습을 드러냈다. 7개월 간의 긴 항해로 발틱함대는 지쳐 있었다. 진해만과 쓰시마 운하 등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의 연합함대가 기동하기 시작했다. 양측 함대의 거리가 8㎞ 정도로 좁혀지자 일본 해군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 제독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일시에 포문이 열렸다. 결과는 일본의 대승. 제정 러시아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키자 일본을 보는 세계 열강들의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도고 제독과 이순신 장군


<일본 쓰시마 만제키바시(萬關橋)에서 바라본 만제키 운하.
1900년대 초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 해군의 신항로로 이용됐다.>

도고 제독의 지휘에 따라 일본 함대가 취한 전투 대열은 일명 '정(丁)자 전법'. 종대로 진행하는 적 함대 앞을 아군이 횡대로 가로막아 선두에 있는 적함에 집중 포격을 가하는 전법이다. 이 전법은 도고 제독의 참모였던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연구해 실용화한 것이라 한다. 우리 민족을 살렸던 학익진 전법이 300년 뒤 일본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이기게 하고, 그 결과가 우리에 대한 식민 지배로 나타났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이란 작품에 그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은 토요토미 군대가 조선에 침입했을 때 해전에서 이들을 물리친 조선의 명장이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의 문무 관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청렴한 인물이었고, 군사통제와 전술능력,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 실로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제독 이전에 바다의 명장이라고 하면 이순신을 빼놓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는 잊혀졌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이순신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하였다….'

곱씹어봐야 할 기술이다. 적의 전술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하여 일본 해군을 키웠다는 대목은, 오늘날 쓰시마 사람들이 한국 관련 기념비를 세워 관광자원화하는 실례와 다르지 않다.

■만감 교차하는 만제키바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쓰시마 이즈하라 시에서 북서쪽으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만제키바시(萬關橋). 1904년 2월 8일 시작된 러일전쟁 직전에 건설된 운하를 잇는 교량이다. 운하 위에 그림처럼 걸린 만제키바시(폭 40~65m, 길이 210m)는 일본 제국주의의 병참기지였던 쓰시마의 근대사를 반추하게 만든다.

1900년 초 대륙 진출을 꾀하던 일본은 일본 본토와 부산 간의 항로 단축을 위해 쓰시마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 운하를 뚫는다. 이로써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생겼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 운하는 전략 거점으로 십분 활용된다.

만제키바시는 일본에 승리를 안겨준 다리지만, 우리에게는 '통한의 다리'라 할 수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5년 후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병합을 당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을 통해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받고,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을 맺어 세계 열강으로부터 한국에서의 '특수 이익'을 보장 받는다. 이어 러시아와 포츠머드 조약을 체결(1905년 9월),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경제 상의 권리를 확보한다.

일제강점기 때 쓰시마는 병참기지로서 인구가 9만여 명(현재는 3만5000여명)에 달했고 한국인도 2만 여명을 헤아렸다. 태평양전쟁 때는 한국인 징용자도 적지 않았다.

쓰시마 운하가 놓인 곳은 고대 이후 대선월(大船越)·소선월(小船越)로 불리는 역사 유적지다. 만제키바시가 놓이기 전 쓰시마는 하나의 섬이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 오는 배들이 쓰시마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려면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넘겼다고 한다. 백제 승려가 불경을 전했다고 하는 쓰시마의 고찰 바이린지(梅林寺) 인근에 소선월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쓰시마와 한반도의 교류 자취이다.

■도고 전승기념비 논란


<경남 거제시에 보관돼 있는 도고 제독의 승전비.>

도고 제독은 러일전쟁 후 일본의 영웅이 되었고 만년에는 '군신(軍神)'으로까지 떠받들여졌다. 시바 료타로가 지적했듯, 도고 제독의 우상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는 "이순신이 장군이라면 나는 그의 하사관에 불과하다"는 말도 남기고 있다.

공교롭게도, 도고 제독의 자취가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던 남해안에 일부 남아 있다. 경남 거제의 도고 승전비와 승전탑, 진해의 친필 비문이 그것이다.

도고 승전비는 1932년 거제 송진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이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2월 22일, 도고 제독은 함대 42척과 병사 3500여 명을 거느리고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사격 훈련을 했다고 한다. 높이 160㎝, 폭 60㎝의 화강암으로 된 비석에는 도고의 친필 출전문이 새겨져 있다.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려 즉시 출동해 적을 격멸하고자 하니 오늘 날씨는 맑고 파도는 높다…'.

해방 직후 이 비석은 뽑혔고 한동안 잊힌 채 거제 장목지서 앞 돌다리 등으로 사용되다 현재 거제시청 창고에 보관돼 있다. 거제시는 일본인 관광객 대상 홍보물에 도고 제독의 전승 기록을 담아 소개하고 있다.

거제시 사등면의 외딴 무인도인 취도에는 '도고 승전탑'(일명 취도기념탑)이 서 있다.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해 1935년 8월 일본 군부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취도는 일제때 함포 사격장이었다.

진해시는 도고 제독 '친필 비문'을 보관 중이다. 일제시대 때 진해에 자리한 일본인 사찰 '진해산덕환사(鎭海山德丸寺)' 이름을 도고 제독이 붓으로 쓴 것을 비석에 옮겨 새겼다. 감정 결과 글씨는 도고의 친필로 확인됐다. 진해시 관계자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사 가겠다는 일본인이 있을 정도로 일본 쪽에선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경남도는 지난 2008년 '이순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고 제독의 승전비·기념탑 등을 복원하려 했다가 시민단체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일본의 전쟁 영웅을 미화한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경남도 관광진흥과 '이순신 프로젝트' 담당자는 "한때 그런 구상을 했으나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보류한 상태"라고 말했다.

도고 승전비가 일본 전쟁 영웅을 미화하는 '치욕의 산물'인지, 과거사의 기록일 뿐인지는 논란거리다. 이 논란은 결국 양국 모두에게 과거사가 '족쇄'임을 보여준다. 과거사의 매듭을 풀지 못하는 일본 정부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피해자인 한국 역시 과거사에 묶여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 인터뷰-민박집 주인 미쓰기 츠지

"3대째 쓰시마 토박이… 우리 조상은 조선에서 왔을지도"




취재진은 지난달 3일 가미쓰시마(上對馬) 히타카츠 인근의 '이즈미(いずみ)' 민박(현지에선 민숙이라 부름)에서 하루를 묵었다. 민박집 주인 미쓰기 츠지(62·사진) 씨는 화통한 일본인이었다. 말과 표정이 담백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손수 맥주와 '사시미' 안주를 준비해 한 잔을 청했다. 알고보니 그는 나무(樹) 의사이자 정원사였다. 자격증을 5개나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두 독학으로 땄다고 했다. 얘기가 오갈수록 한일 간 벽이 저절로 허물어졌다.

- 한국인이 이 집에 자주 오는가.

"가끔씩 온다. 낚시꾼들이 많다. 한국인들이 와야 우리 같은 사람이 산다. 많이 오게 해 달라."

- 쓰시마 토박이인가.

"그렇다. 3대째 살고 있다. 아마 우리 조상은 조선에서 건너왔을 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한국의 표류선들이 많이 닿았다는 말을 들었다."

- 한국인이 여기에 땅을 살 수도 있느냐.

"그렇다. 조건이 좀 까다로울 거다. 부산이 보이는 곳에 땅이 좀 있는데 구경해 보겠느냐. 원하면 보여주겠다."

- 한일 교류를 어떻게 생각하나.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하다. 마음을 열면 친구가 된다. 아직 부산에는 못 가봤지만 가보고 싶다. 일본보다 한국이 가깝다는 건 서로 친구가 돼라는 것 아니냐."
이전 부산문화재단, '쓰시마 아리랑축제' 중 조선통신사 행사[포토뉴스]-국제신문(2010.8.10) 2010. 08. 10  |  3,533
현재 한일 새로운 100년과 부산 <3> 도고 승전비 다시 보기-국제신문(2010.8.10) 2010. 08. 10  |  3,077
다음 400여년 전 조선통신사 '한일 우호 교류' 길을 열다-경북일보(2010.9.1) 2010. 09. 03  |  2,949
  • 1030
  • 323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