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의 무공도 칭송… 민·관 함께 '선린우호' 외치며 실익 챙겨
조선시대 이후 근·현대사 증언 기념비만 11개…타국 인물도 높이 받들어
한국관광객 유치 기대감도 한몫
섬 전역에 한국인 환영 한글표지판…日·韓 친선 유난히 강조
인적교류 확대 등 실익 챙기기 우리도 나서야
쓰시마에는 한국과 관련한 이런저런 기념비가 많다.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것들이다. 쓰시마의 중심도시 이즈하라시에는 최익현 순국비, 조선통신사비, 성신지교린비, 고려문, 통신사 김성일 시비,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있다. 또 대아호텔 입구에는 한국 사학자 정영호 선생의 쓰시마 내방100회 기념비가 서 있다. 가미쓰시마(上大馬)로 가다보면 통신사 이예 공적비, 백제 왕인 박사 현창비, 신라국사 박제상 순국비, 조선역관사 순난지비를 만난다. 줄잡아 11개다. 자의식 강하고 자존심이 센 일본인들은 왜 자기네 땅에 이토록 많은 한국인 관련 기념비를 세웠을까.
<동아대 학생들이 지난달 1일 일본 쓰시마 이즈하라시 인근 해변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 쓰시마의 생존 방식
<쓰시마 이즈하라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일한 친선' 안내판. > 지난달 3일 이즈하라 시내서 취재진을 만난 쓰시마의 원로 사학자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93) 옹이 한국 기념비에 대한 궁금증을 일부 풀어주었다.
"한일 간 선린우호 차원일 것이다. 한국 관광객 유치 기대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인물,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가려 세웠다."
나가도메 옹은 '대마국지' '아메노모리 호슈' 등 굵직한 저서를 갖고 있는 쓰시마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다.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고 지인이 적지 않다. 한국 관련 기념비들은 대부분 그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고증과 평가 작업엔 정영호(현 단국대 박물관장) 박사 등 한국측 학자들도 함께 참가했다. 다시말해 이들 기념비는 한일 공동 현창(顯彰)사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즈하라 시내의 전통 사찰인 수선사(修善寺) 경내에는 '대한인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라 적힌 비석이 있다. 비석 안내판에는 한글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최익현 선생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한말의 어려운 정세 속에서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항일 운동을 일으켜 일본 헌병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적사(謫舍)에서 순국하셨다…'
한국 독립투사의 순국비가 가해자인 일본 땅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제시대 '항일(抗日)' 독립투사들을 무차별 탄압하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이 대목을 나가도메 옹은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고유 문화는 비록 적장이라도 의롭고 존경할 만하면 무공을 칭송해주었다. 최익현 선생이 그런 분이다. 순국비를 세운 것도 그런 맥락이다."
■'호슈의 정신' 되살릴 때
<쓰시마에 세워져 있는 한국 관련 기념비들. 조선통신사 정신을 담은 '성신지교린비'.>
나가도메 옹은 한일교류사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 그는 "한일 교류사를 이야기 하려면 '마키노시마(牧島)' 즉 영도의 석기시대 패총을 살펴야 하고, 남해안 늑도(사천시) 유적을 검토해야 한다"면서 "2000년 전부터 한일 교류가 있었으며 당시 늑도와 김해, 쓰시마 등은 국제무역항이었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왜인(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왜관(倭館, 일본에선 화관(和館)이라 부름)'과 역관사들의 활동도 주목해야 한다고 나가도메 옹은 강조했다.
"임진왜란 후 쓰시마는 20여년 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 후 인구가 3분의 1가량 줄었다. 17세기 중반 쓰시마의 은(銀)광산이 개발되어 경제가 살아나면서 왜관을 토대로 교역이 활발해졌고, 외교적으로는 역관사들의 역할이 컸다."
내일의 한일관계와 쓰시마의 역할에 대해 묻자, 그는 "쓰시마의 역사는 한국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찍부터 밀접한 교류를 가졌다"면서 "한일 간 새로운 미래를 '호슈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호슈의 정신'이란 18세기 쓰시마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가 강조한 '성신교린(誠信交隣·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 성의와 신뢰를 다해야 한다는 뜻)의 정신을 말한다.
■'일한 친선'과 실익
<독립운동가인 '최익현 선생 순국비'.>
쓰시마 사람들은 '일한 친선'을 유난히 강조한다. 이즈하라시 조선통신사 거리 곳곳에는 한국인을 의식한 듯한 안내판이 나붙어 있다. '일한 친선을 중요하게- 쓰시마 도민은 일한 친선을 소중히 하는 한국인을 환영합니다. 일본 고유의 영토 쓰시마는, 역사와 관광의 섬입니다(대마방위대)'.
'영토'란 말이 민감하게 와닿기는 하지만, 한국과의 관광교류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이러한 안내판은 쓰시마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쓰시마 중간에 운하를 뚫어 연결한 만관교(萬關橋) 옆에는 어느 민박집에서 '환영-교류 日韓, 요리 뛰어남'이란 입간판을 세워 둬 눈길을 끌었다. 민관이 함께 한일 교류로 '실익'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과 최단 거리라는 쓰시마 상단 와니우라 해변에 세워진 한국전망대에서는 가끔 부산으로도 휴대폰이 터진다. 이 전망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국경의 땅이지만, 왠지 바라보게 되는 이웃나라, 한국을 전망해보시고 역사의 감동을 느끼시길….' 이곳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부산 해안을 보고 있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쓰시마를 찾는 한국인은 연간 약 4만5000명으로 쓰시마 인구(3만5000명)보다 휠씬 많다. 쓰시마가 주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주는 게 더 많다. 그렇다면 교류를 통해 우리가 챙겨야 할 실익은 무엇일까.
지난달 초 학생봉사단을 이끌고 쓰시마에서 청소를 하고 온 동아대 오윤표 학생처장은 인적 교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했다는 그는 "인문 사회계통은 우리에게도 배울 부분이 있을법한데, 여전히 일본 유학생은 잘 오지 않는 것 같다"며 "젊은 일본 학생들을 유치해 미래의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동아대는 올해 처음 쓰시마고교에서 입학설명회를 열었다.
일본 학생 유치는 부경대가 한발 앞서 있다. 지난 2001년 강남주 총장 재임시 쓰시마 공략을 시작한 부경대는 현재 22명의 일본 학생(쓰시마고 출신 4명)이 유학하고 있다.
얼마 전 부산을 찾았던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81) 박사는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역학 구도 속에서 한일 관계를 살펴야 한다"면서 "지역사 연구에 지역 학자들이 더욱 매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부산초량왜관연구회 최차호 회장은 "이제 우리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면서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마음이 통하며, 그때 새로운 관계가 열리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 마쓰바라 가즈유키 조선통신사 연지협 회장 "왜관은 평화교역 거점… 한일교류 새 고리 될 것"
조선통신사 축제는 1990년대 이후 한일 간 가장 성공한 문화교류 사업으로 꼽힌다. 마쓰바라 가즈유키(松原一征)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 이사장은 통신사 부활의 숨은 공로자다. 그간 공로로 그는 지난 2월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숭례장(崇禮章)을 받았다. 지난달 1일 이즈하라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미래 과제'를 주제로 인터뷰 했다. 그는 통신사를 잇는 한일 새로운 교류의 고리로 '왜관(倭館)'을 주목했다.
-왜 왜관이며,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나.
"부산에 있었던 조선시대 왜관은 한일 우호 교류 통로였고, 평화적 교역의 거점이었다. 조선통신사와 왜관을 접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로운 한일 문화교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에서는 '왜(倭)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왜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왜관 건축물은 조일 합작이었다. 그 속에서 수준높은 기술교류가 이뤄졌다. 젊은 세대들에게 좋은 교육 마당이 될 수도 있다."
- 부산에 초량왜관연구회가 창립돼 활동 중인데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다.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쓰시마에서도 왜관연구회를 만들어 한일 민간교류를 하는 방안을 찾아 보겠다."
- 한일 새로운 100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나.
"정치적인 질문이라 조심스럽다. 어쨌든 과거사를 왜곡해선 안 될 것이다. 과거사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보고 함께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