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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HOME > 부산사무소 > 역사속의 부산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조선에 와서 외교와 무역을 하던 곳이다. 조선 전기 세종 때에는 내이포(현 진해 웅천),부산포(현 부산 수정동), 염포(현 울산 염포동)등 세곳에 왜관이 있었고 임진왜란(1592년)으로 인해 왜관은 폐쇄되고 일본사절이 서울로 올라가 조선국왕을 알현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1607년 신축된 두모포왜관(현 동구 수정동)은 좁고, 선착장시설이 빈약하여 여러차례 이관(移館)이 진행되다 마침내 초량왜관이 1678년(숙종 4) 개관하게 되었다. 초량왜관은 약 200 년간 존속하다가 1878년 개항 이후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바뀌었다.
당시의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경계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는데, 현재 대청동에 해당하는 동관에는 왜관의 책임자인 관수의 숙소이자 집무실이었던 관수가(館守家)와 조선과 일본의 분쟁을 해결하는 쓰시마의 관리가 묵던 숙소 재판가(裁判家),조선 상인의 출입이 유일하게 허용되어 실질적인 무역이 행해지던 개시대청(開市大廳)의 3대청이 있었다.
서관에는 쓰시마에서 파견된 관리가 묵던 3대청과 일본에서 온 외교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향연을 베풀던 연향대청(宴享大廳)이었다. 지금의 대청동이라는 지명은 연향대청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량왜관도는 통신사행에 참가했던 부산사람 변박의 작품이다.

조선전기에 지정된 왜관은 제포(현 진해 웅천),부산포(현 부산 범일동), 염포(현 울산 염포동)등 세곳에 왜관이 있었고 일본인과 조선인은 허가를 얻어 왜관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이전의 왜관은 폐쇄되고 일본사절이 서울로 올라가 조선국왕을 알현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후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은 1607년(선조40)부산에만 왜관을 두어 외교와 무역을 허락하였는데 이때 세워진 것이 두모포왜관이다.
두모포왜관은 현재 동구 수정시장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왜관의 동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 남, 북쪽 경계에는 담을 쌓았으며, 왜관 동문 밖에는 좌천(左川)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두모포왜관이 있던 주변을 고관(古館) 또는 구관(舊館)이라고 부르는데 이름은 1678년(숙종 4)에 신축한 초량왜관(현 용두산 공원 일대)을 신관(新館)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두모포왜관은 부지가 좁고, 선착장은 수심이 얕을 뿐만 아니라, 남풍을 직접 받아 각종 배들이 정박하기에 부적합하니 이관해 달라는 일본측의 요청이 거듭되었고 또 부산진성 등 조선의 군사시설과 가까워 국가기밀이 누설될 위험도 많았다.
따라서 이관 논의가 자주 대두되다가 마침내 1678년 초량왜관이 개관되면서 두모포왜관은 폐쇄되었다.

연향대청은 일본 사신을 대접하기 위한 연회가 베풀어지던 곳으로 17 ~ 19세기 양국간의 선린우호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당시 규모는 연향대청 18칸, 헐소(歇所:일본사행들이 잠시 머물던 곳)4칸, 헐청(歇廳)2칸, 남문 3칸, 북문 1칸, 공수간(公須間 : 연향대청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17칸으로 1653년 동래부사 임의백이 처음 세웠다. 1686년 동래부사 이향이 중창하고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거듭 중창하였는데 그 위치는 초량왜관 북쪽 담장 밖 동래부의 남쪽 30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 부산이 대일 교섭의 유일한 창구가 되자 일본 사신은 부산포에 도착하여 먼저 초량객사(조선임금의 殿牌를 모셔 놓은 곳)에서 예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였다.
이어서 연향대청으로 자리를 옮겨 동래부사과 일본사신이 공식적인 서계(書契:외교문서)를 교환하고, 동래부사의 환영연을 받은 뒤 일본사신 일행은 북문을 통하여 초량왜관으로 들어 가 머물렀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연향대청은 1876년 초량왜관이 일본인 거류지로 바뀌면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제1소학교가 세워졌다가 현재 광일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대청동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영가대(永嘉臺)는 한양에서 출발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도착하여 일본(쓰시마)으로 떠나기 전에 향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제를 올리던 곳이다.
이곳은 1614년 토쿠가와(德川)막부와의 국교가 회복된 후 얼마 안돼 경상도순찰사 권반(權盼)이 자성대 근처 해안에 수군의 새로운 정박장을 만들면서 파낸 토사로 쌓아올린 낮은 언덕이었다. 권반은 이곳에다 큼직한 누대를 짓고 자신의 출생지 안동의 옛 지명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불렀다.

18세기 초반 초량왜관의 업무담당 창구로, 동래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사무소가 왜관 근처에 존재하였다.업무상, 일본어가 능숙한 통역관이 그곳에 체재하였는데 그 관리,지도를 맡은 것이 훈도이다.
1725년에 동래에 부임한 현덕윤(玄德潤 1676 ~?)이 1727년에 이곳의 훈도로 취임하여 허물어져 가던 이 사무소를 보수하여 성신당(誠信堂)이라 이름하였다. 현덕윤과 당시 쓰시마의 대 조선외교에서 활약한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 1775)의 국경을 초월한 인정미 넘치는 교류인 '誠信之交'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성신당이다.
성신당은 지금의 봉래초등학교 자리인 초량왜관 북동쪽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



- 출처: 「초량왜관의 발자취를 찾아서」 박화진(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2002년 5월 3일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한 부산박물관은 제2전시관에 한ㆍ일관계사실을 마련하여 조선통신사 행렬 모형을 비롯한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야외에는 왜관 안에 설치하였던 약조제찰비(約條製札碑)가 전시되어 있다.
약조제찰비는 1683년(숙종9)에 동래부와 쓰시마도주가 왜관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원래 비석의 위치는 초량왜관이 있던 용두산공원 동쪽이었는데 1978년 5월 부산박물관으로 옮겼다. 비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대소사를 막론하고 금지한 경계 밖으로 넘어 나오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린다.
  • - 노부세(路浮稅)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면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 - 개시(開市)하였을 때 각 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매매하는 자는 조선, 일본 각기 사형
      으로 다스린다.
  • - 4,5일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 창고지기, 통역 등을 일본인들은 절대 구타
      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 - 조선, 일본 범죄인은 모두 왜관 밖에서 형을 집행한다.
  • - 왜관 거주자가 관 밖에 용무가 있으면 관수에게 보고한 후 훈도, 별차에게 통행증을 보여야
      왕래할 수 있다.
각 조의 내용을 써서 왜관 안에 세워 이로써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1683년 8월

에도(江戶)시대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을 조선통신사라고 한다.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쇼군(將軍)일대의 의식' 으로 매우 중요시 하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의 약 200여 년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의 삼사(三使) 이하, 회원ㆍ의원ㆍ역관ㆍ약사 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사절단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선단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일본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2007년 10월 29일 부산광역시 중구청

이 벽화는 1636년(인조 14)의 조선통신사 행렬도로 부산광역시 녹지 공원과(녹지사업소)에서 2000년 10월경 서면 교차로 조경사업시설치한 것이다. 당시 서면 교차로의 특화 조경을 위하여 각계여론을 수렴하는 공청회 과정에서 부산을 상징하는 역사적, 지역적 특성을 공간별(5군데)로 반영해야 된다는 의견에 따라, 조선통신사가 부산을 거쳐 일본(대마도)을 왕래하였다는 것을 부산 시민들에게 널리기 위해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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