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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슬픈 역사 간직한 비석만 남아있어-경상일보(2005.12.3)
등록일 2005. 12. 06 조회수 2,292
⑨ 최익현 순국비와 덕혜옹주 기념비


충의지사 최익현 선생 순국비

이즈하라 시내의 수선사를 방문했다. 이 절은 백제의 비구니 법묘(法妙尼)가 세웠다고 한다.

옛날에는 입구가 포구였다고 하나 지금은 매립되어 바다에서 꽤 떨어져 있다. 이 절 경내에 구한말 충의지사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선생은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끌려와 일체의 음식을 끊고 순국하였다.

수선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부산으로 운구하였으나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를 세웠다. 선생은 당시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위협에 결코 굴함이 없이 그들이 주는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은 채 단식으로 항거 하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선생의 고결한 인품에 감동하며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으로 역대 대마도주의 거소였던 킨세키성(金石城)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성은 지금 거의 폐허가 되고 성터만 남아 있다. 여기에 '이왕가 '소오가백작 결혼기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라 쓰여 진 커다란 비석이 있다. 높이 20여m에 달하는 이 비석은 1931년 대마도 거주 한국인들이 고종의 따님 덕혜옹주와 대마도주 소오 다케시(宗武志)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옹주는 1932년 결혼 다음해에 딸(正惠) 하나를 두고 불행히도 1955년에 이혼하였다.

덕혜옹주는 기울어진 국운의 희생으로 어쩔 수 없는 정략결혼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고민으로 옹주는 거의 정신병을 앓는 상태에서 대마도로 출가 했다가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이혼하게 된 것이다. 옹주는 1961년 귀국하여 1989년에 비운의 생애를 마감했다.

대마도 기요수이산성(淸水山城)에도 도민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세웠던 기념비가 있고, 주변에는 기념비와 함께 심었던 철쭉들만 무심하게 해마다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대마도를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에보시 언덕전망대(烏帽子岳展望臺)에도 올랐다. 이 전망대는 1989년 나가사키현의 지원으로 건립한 것인데, 높이는 해발 176m라고 한다. 전망대에서는 아소만(淺芽灣)이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경관이 좋은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그 운치는 일품이었다. 서쪽 바다 건너 멀리 우리나라 산들이 희미하게 보이며 그 사이에 파도가 넘실거리는 대한해협이 가로놓여 있다.

바로 이 대한해협이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트함대가 일본해군의 습격으로 격침된 역사의 현장이다. 이 해전은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를 가리는 마지막 한판 승부였다.

당시 영국이 관장하고 있던 수에즈운하의 통과가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트함대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거쳐 아프리카대륙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에 다다랐을 때는 장장 8개월간 28,800km의 항해로 연료와 보급품이 거의 바닥나고 지친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발트함대는 일본함대가 진해만과 아소만에 숨어 있는 줄 모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질러가기 위해 폭이 좁은 대한해협을 항로로 택했다. 일본해군은 이미 섬을 한 바퀴 돌지 않고도 군함이 아소만에서 동서로 민첩하게 왕래할 수 있는 비밀 인공운하를 파고 적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트함대는 30척이 넘는 많은 군함으로 편성되었지만 함선은 모두 구식이고 병사들은 농민출신으로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발트함대는 속도, 화력 어느 것 하나 일본 함대를 당할 수가 없었다. 일본은 결과적으로 발트함대를 지리멸렬 시키고 침몰 19척, 나포 5척, 전사자 4천800명, 포로 6천100명이라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러시아 황제 차르체제는 붕괴되고 일본은 신흥제국주의 국가로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일제는 이를 바탕으로 삼아 대륙침략으로 이어지는 팽창시대의 출발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상(上)대마에는 러일해전 승전탑이 두 군데나 서 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2005년 5월 승전 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렀다.
[2005.12.0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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