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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대마번 생계유지 위해 외교문서 위조-경상일보(2005.12.2)
등록일 2005. 12. 06 조회수 2,524
⑧ 국서(國書) 위조의 현장


조선과의 교역을 원하는 대마도가 국서위조를 한 이후 일본으
로 파견된 통신사 김성일 부사의 시비가 서산사 경내에 서있다.

대마도는 7년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과의 무역이 단절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하루 속히 조선과의 교역재개를 원하던 터였다. 사명대사가 이에야스와의 교토 강화협상에서 국교수복 등 원칙적인 합의를 도출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의 견해차이로 통신사 파견과 교역재개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사명대사가 교토 후시미성 회담 때 '전란 중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 인도를 요청한데 대해서도 일본 측은 진범 색출이 어려워 가짜 범인을 속여 조선 측에 인도했는가 하면, 외교문서조차 대마번에 의해 위조되었던 것이다.

당시 양측의 중요 쟁점이 된 것은 몇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를 들면 조선 측이 일본국왕 명의로 먼저 조선국왕에게 과거의 침략을 사죄하고 재침을 않겠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일본은 통치체제가 조선과는 달랐기 때문에 실권자 도쿠가와 장군명의로 국서를 작성한데 반해 조선 측은 일본국왕명의의 국서와 인장 날인을 주장한 것이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대마번은 교역재개의 다급성을 감안, 궁여지책으로 도쿠가와 장군 명의 국서를 일본 국왕명의로 정정하고 인장을 위조 날인하여 조선 측에 보내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국왕의 국서 내용의 일부조차도 도쿠가와 장군의 심기를 건드릴 우려가 있는 부분을 대마번이 임의로 수정하였으며, 조선 측도 위작사실을 알면서 묵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교섭의 실무 담당이었던 조선 측의 전계신(全繼信)과 손문욱, 그리고 일본 측의 다치바나 토모마사 등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부산과 대마도를 오가며 협상의 고충을 몸소 겪었던 인물들이다.

이와 같은 대마번의 국서위조를 에도막부가 뒤늦게 알게 된 것은 1633년이었다. 대대로 대마번주의 신복이었던 야나가와 후손의 폭로에 의한 것이었다. 19대 번주 소오 요시토시의 아들 요시나리(義成)와 그의 중신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의 아들 시게오키(調興)간의 불화로 윗대의 국서 위조 사실이 막부에 고발되어 결국 양측이 공히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이를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 이라 하는데, 이 국서 위조사건의 산실 또한 서산사가 아닌가 싶다.

국서 위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위조하여 우리조정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의기 양양해진데다가 당시 국제관계를 잘 몰랐던 만용 때문에 조선은 물론 명나라까지도 안중에 없었다. 그는 몇 차례 대마 번주를 시켜 조선국왕을 일본에 불러들이도록 즉 참락(參洛)을 명령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대마 번주는 차마 히데요시의 명령을 사실 그대로 우리 조정에 전할 수가 없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참락'을 요구 하는 국서를 '통교' 요구라는 내용으로 개작하여 조선에 전달했다. 그 때 우리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1590년 대마 번주 소오 요시토시와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 등을 우리 조정으로 파견했다. 이들 대마 측의 노력도 있고 하여, 우리 조정은 당시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여 통치자가 된 이후의 일본 정세를 정탐할 겸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파견된 통신사가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귀국 보고를 상반되게 하여 그 결과를 놓고 후일 역사에 많은 말썽을 일으켰던 것이다.

통신사의 정사와 부사가 상반된 보고를 한 것은 국내적으로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흐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조일 양국관계에 있어서는 조선이 히데요시 집권에 대한 축하사절의 의미를 띠게 됨으로써 '조선이 일본에 복속(服屬)한 입공사(入貢使)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당시 통신사 파견 자체가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대마 번주와 가신들 그리고 대마와 깊은 관계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국서 개작은 당시 '샌드위치' 입장이 된 대마도가 양측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게 하기 위해 미봉책으로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조일 양국을 속이고 히데요시의 망상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어 일본의 조선침략이 자행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 교섭에서도 이와 유사한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의 강화는 파탄되고 정유재란의 재침으로 이어졌다.
[2005.12.0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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